
◆ ‘핏줄의 이름으로, 한 사람을 되살리다’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200년 전 가족의 기록을 마주한다는 건, 수만 점의 고문서를 다뤄온 나에게도 여전히 숙연한 일이다. 이번 칼럼에서는 1811년 조선 후기, 한성부 서부 지역에서 작성된 입후(入後) 관련 예조입안(禮曹立案) 문서를 소개하려 한다.
이 문서는 골동품 경매시장에서도 특히 높은 평가를 받은 자료다. 그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 수도인 ‘한성부’에서 작성된 관문서라는 점에서 지역적 희소성이 있다.
둘째, 관문서 특유의 이두(吏讀) 표현이 그대로 드러나 있어, 조선시대 행정 언어의 단면을 살펴볼 수 있다.
셋째, 문서 좌측에 판서, 참판, 참의 등 당상관 세 명의 묵서(手決)와 함께 정랑·좌랑의 직명이 기재돼 있어, 당대 관료제의 결재 구조를 명확히 보여준다.
◆ ‘한성 서부에서 울린 사연’
이 입안문서의 중심에는 유학 송성규라는 인물이 있다. 그가 예조에 올린 청원의 내용은 이러하다.
“생증조 송진원은 서부 참봉을 지낸 인물입니다. 그의 아들 송필상이 일찍 세상을 떠났는데, 처와 첩에게서 모두 자식을 얻지 못했습니다. 이에 동성(同姓)인 숙부 송환우를 송필상의 후사로 삼고자 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송환우가 송진원의 아들이 아니라 송필상의 후사로 입적된다는 것이다.
즉, 사망한 아들의 후사를 삼는 형식으로 방계 혈족이 대를 잇는 구조다. 이와 같은 입후(入後)는 단순한 가족 내부의 합의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었고, 조선시대 국가 법전에 근거해 왕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절차였다.

◆ ‘왕에게 청원하다 – 입후의 법적 근거’
이에 따라 동부승지 이당(李溏, 1758~1819)은 ‘대전통편’과 ‘경국대전’의 관련 조항을 근거로 입안을 작성했다.
“처와 첩에게서 모두 자식을 얻지 못하였을 경우, 동종(同宗)의 지자(支子)를 후사로 삼을 수 있으며, 양가에서 함께 의논하여 후사를 세울 경우, 이를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
이당은 이 법적 근거를 바탕으로 송성규의 입후 청원을 왕에게 올렸고, 왕의 허가가 떨어진 뒤 예조 입안이 최종적으로 완성되었다. 이 과정을 단순한 행정 절차로만 받아들이기엔, 그 안에 담긴 마음이 너무 절절하다. 죽은 이를 위해 후사를 세운다는 것은 조선 사회에서 ‘존재를 다시 불러내는 일’이었다. 비어버린 제사상의 자리를 채우고, 족보에 이름을 다시 올리는 것. 그것은 곧 “잊히지 않게 하겠다.”라는 가족의 다짐이었다.
◆ ‘고문서에 되살아난 가족의 이름’
문서는 정결한 해서체로 작성되었고, 곳곳에 이두 표현이 섞여 있다. 예를 들어 “爲白有去乙(화왓삽거늘)”, “是白在果(이삽거니와)” 같은 문장들이 그러하다. 이러한 문장 구조는 조선시대 관문서의 언어와 형식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문서 좌측에는 판서·참판·참의의 관직명 아래로 각 관리의 수결(手決)이 묵서되어 있고, 다섯 곳에 관인이 찍혀 있다. 보존 상태도 매우 양호하며, 크기는 가로 74.5cm, 세로 105cm에 이른다.
이 문서는 2015년 11월, (주)코베이옥션 ‘삶의흔적’ 경매를 통해 처음 세상에 공개되었다. 당시에도 한성부에서 작성된 입후 문서라는 점, 입후 절차에 담긴 법제적 논리, 그리고 조선 후기 가족제도의 변화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학계와 수집가의 주목을 동시에 받았다.
입후 문서에 이름을 올린다는 것은 단순히 한 사람을 적는 일이 아니다. 그 이름을 다시 쓰는 순간, 그 사람은 다시 기억되는 사람이 된다. 자식을 남기지 못한 송필상은 말없이 세상을 떠났지만, 송성규는 그 빈자리에 숙부 송환우의 이름을 올림으로써 가문의 불씨를 끄지 않겠다는 다짐을 문서 위에 새겨 넣은 것이다.
핏줄을 잇는다는 것은, 돌아올 수 없는 이를 대신해 그 사람의 자리에 다시 이름을 놓아주는 일이다.
그 이름이, 다시는 잊히지 않도록.